나의 모든 삶을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보통은 문학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단순 관광지역, 쇼핑지역으로만 알았던 명동부터 시작하여 이상이 살았던 동네 서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가까이 있었던 상계동.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공간 속에서 문학과 역사를 발견해내는 것은 얼마나 유의미한 시도일까.
전쟁이 서울을 한바탕 쓸고 지나간 뒤의 명동 거리. 소설가 이봉구는 명동 거리의 국립극장 시공관 간판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시공관을 향하여 “너마저 폭격을 맞았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러면 난 한강에 투신해버렸을 거다.” 라고 말한다. 연극, 음악, 무용 한 시대의 문화가 집대성 되어있는 시공관은 단순히 역사·문화적으로 가치를 갖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이봉구와 함께 하고 있던 것이다.
<명동백작>은 당시 명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시인, 소설가 등의 예술가들의 삶을 자세히 엿볼 수 있는 영상이다. 소위 외국인들 피 빨아먹는 명동의 현주소와 사뭇 다른 50년대 명동의 의미는 다분히 새롭게 다가왔다.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봉구 소설가는 매일같이 다방과 선술집, 길거리 주점을 순회하며 다소 한량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허나 명동을 지키다시피 하는 그가 호탕하면서도 신사적인 성격으로 서민들에 공감하고 예술가들과 사색하니 왜 명동백작이라 불릴 만 했는지 잘 느껴진다.
또한, <명동백작>은 실제 이봉구 소설가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드라마에 나타나는 박인환, 김수영, 천경자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단순 연기를 넘어 실제 그들의 삶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듯했다. 이봉구 소설가가 겹겹이 쌓아온 명동 공간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과거 명동의 문학사·예술사적 가치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명동백작> 2부에서부터는 김수영 시인의 삶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시에 대하여 문외한이었던 내가 김수영 시인의 「죄와 벌」을 읽어본 게 스무 살이었고 그 당시 같이 시를 읽던 친구들과 ‘그는 가정폭력범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대화가 머릿속에 맴돈다.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히고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어대는(「죄와 벌」 부분) 그 상황에서의 화자는 누가 봐도 김수영 시인이었으니.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의 아내는 친구와 바람까지 났다. <명동백작> 2부까지의 얘기는 여기까지 이지만 번외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은 김수영 시인의 친구에게 감금되다시피 살았던 것이었고, 다시 김수영 시인에게로 돌아가 그가 교통사고로 죽는 날까지 함께 살게 된다.
김현경의 회고록 『김수영의 연인』에서 김현경은 영화관에서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을 보고 나오다가 김수영이 자신을 때린 일에 대해서 회상을 하곤 하는데, 이를 통해 생각이 든 것이 김수영의 「죄와 벌」만큼이나 비참한 현실고증의 시가 또 있을까. 비참함과 모든 비극, 그로부터 생겨난 광기의 편린들이 그를 얼마나 괴롭혔을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데에 중요한 것은 ‘혼란’의 향수를 싹틔우는 것이다. 혼란이 없는 시멘트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게 없기 때문이다. 한편, 시 쓰기는 모험의 의미를 띤 ‘자유의 이행’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온몸으로 하여야 한다고 김수영은 말한다.
「시여, 침을 뱉어라」를 읽으면서 나는 왜 영화 <설국열차>가 오버랩 되어 보일까. 영화에서의 열차라는 공간은 그레이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군거의 공간, 인습에 사로잡혀있으며, 순종하고’, 칸마다 계급이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는 공간이다. 열차 꼬리 칸에서의 남궁민수(송강호)는 앞쪽 칸까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시작하여 말 그대로 ‘온몸’으로 밀고 나간다. 이는 모험이며 서술도,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열차를 벗어나 모든 것이 멸종되었다고 알고 있던 세상 속에서 북극곰 한 마리를 발견하며 끝이 난다. 이는 결국 역사의 기점이 된 것이다.
영화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은 모 대통령 시절 블랙리스트가 세상에 밝혀졌을 때, ‘특정 영화 블랙리스트’에 <설국열차>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 저항 운동을 부추긴다는 이유에서였다.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이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라는 걸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말인가.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가 발표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의 이론을 시에만 국한시키고 싶지 않다. 앞서 영화를 떠올렸던 것처럼 영화, 드라마, 음악, 유튜브, 웹툰 등 다양한 매체에 접합하고 변형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김수영의 ‘여전히 유효한 사유’라는 생각이 든다.
<설국열차>에서 등장인물이 열차라는 세계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는 것처럼 우리 또한 바깥으로 나가야한다. 바깥에 정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란은 혼란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순적인 몸부림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나는 원래가 약게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진실을 잊어버려야 하는
내일의 역설 모양으로
나는 자유를 찾아서 포로수용소에 온 것이고
자유를 찾기 위하여 유자철망을 탈출하려는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말았다
「여보세오 내 가슴을 헤치고 보세요 여기 장 발장이 숨기고 있던 격인보다 더 크고 검은
호소가 있지요
길을 잊어버린 호소예요」
「자유가 항상 싸늘한 것이라면 나는 당신과 더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포로의 애원이 아니라
이미 대한민국의 하늘을 가슴으로 등으로 쓸고 나가는
저 조그만 비행기같이 연기도 여운도 없이 사라진 몇몇 포로들의 영령이
너무나 알기 쉬운 말로 아무도 듣지 못하게 당신의 뺨에다 대고 비로소 시작하는 귓속 이야기지요」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 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갔는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용감하게 싸웠느냔 것에 대한 대변인이 아니다
또한 나의 죄악을 가리기 위하여 독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봉하기 위한 연명을 위한 아유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명이 지루하다고 꾸짖는 독자에 대하여는 한마디 드려야 할 정당한 이유의 말이 있다
「포로의 반공전선을 위하여는
이것보다 더 장황한 전제가 필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어마어마한 전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싸워온 독특한 위치와 세계사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위하여 출발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끝을 맺은 나의 생명과 진실에 대하여
아무런 뉘우침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볼 필요가 없다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같은 밥을 먹었고
꽃같은 옷을 입었고
꽃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이마 위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왔다
그것이 너무나 순진한 일이었기에 잠을 깨어 일어나서
나는 예수 크리스트가 되지 않았나 하는 신성한 착감조차 느껴보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나오려고
무수한 동물적 기도를 한 것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용서하여 주시오
포로수용소가 너무나 자유의 천당이었기 때문이다
노파심으로 만일을 염려하여 말해 두는 건데
이것은 촌호의 풍자미도 역설도 불쌍한 발악도 청년다운 광기도 섞여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날더러 다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은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 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빨리 38선을 향하여 가서
이북에 억류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UN군의 포로들을 구하여내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북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상병포로들에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한 감이 듭니다」
내가 6.25 후에 개천 야영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북원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 내무성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평양을 넘어서 남으로 오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내가 만일 포로가 아니 되고 그대로 거기서 죽어버렸어도
아마 나의 영혼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대한민국 상병포로와 UN 상병포로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수고하였습니다」
「돌아오신 여러분! 아프신 몸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우리는 UN군에 포로가 되어 너무 좋아서 가시철망을 뛰어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못 뛰어나오고
여러 동지들은 기막힌 쓰라림에 못 이겨 못 뛰어나오고」
「그러나 천당이 있다면 모두 다 거기서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넘어진 반공포로들이
다 같은 대한민국의 이북 반공포로와 거제도 반공포로들이
무궁화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자유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반항의 자유
진정한 반항의 자유조차 없는 그들에게
마지막 부르고 갈
새날을 향한 전승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그것은 자유를 위한 영원한 여정이었다
나직이 부를 수도 소리 높이 부를 수도 있는 그대들만의 노래를 위하여
마지막에는 울음으로밖에 변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여!
나의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지금 이 땅에는 온갖 형태의 희생이 있거니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버릴 것인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릴 것인가!
<1953. 5. 5>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들에게」는 제목부터 독자를 상정하며 시작한다. 상병포로란 부상이나 병이 든 전쟁 포로이다. 김수영 또한 북이 남침을 하자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있었는데 따라서 이 시는 김수영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발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건 바로 자유다.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고 말하며 시는 시작한다. 이 외에도, 자유를 노래하는 구절이 다양한 곳에 도사려있다. 이 시에서 말하기를 포로수용소는 결국 자유로의 여정을 나선 곳에 존재하는 곳이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들에게」는 독특한 형식으로 전개가 되고 있는데, 시의 길이가 소설과 산문처럼 길고 시인이 연설하는 듯한 구어체의 문장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나는 그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어마어마한 전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싸워온 독특한 위치와 세계사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 하였고 이 시에서는 상병포로들의 ‘독특한 위치와 세계사적 가치’에 대한 옹호와 변호를 온몸으로 도맡아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아볼 수 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중요한 구절로 생각이 되었던 것이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란은 중대한 일이며 자유를 위한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1968년에 발표한 원고이지만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들에게」는 1953년 집필된 시로서 15년의 간극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에 대해 노래하는 부분에서 15년의 간극이 무색할 정도로 일관성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삶의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김수영은 다양한 혼란을 노래한다. ‘수용소의 무질서와, 수용소 탈출 이유, 개인사와 반공포로들을 위한 노래’. 노래에는 찬양과 칭송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며, 한편 혼란을 노래한다는 것은 김수영이 ‘혼란을 자유로의 중요한 필수요건’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시와 산문을 보고난 후, 자유를 갈망하며 혼란의 노래를 부르짖은 그의 일관성 있는 모습에 큰 매력을 느꼈다. 허나,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는 ‘사후에 형제들이 보관하던 서류 뭉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자유로의 혼란을 주창하던 그도 시대를 반영한 스스로의 검열은 어쩔 수 없었나보다.
김수영의 삶을 엿보며 느낄 수 있었던 건 그가 마치 연극배우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실제로 연극배우 활동을 하는 지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연극배우들 중에는 매우 소심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면으로 쌓고 쌓던 에너지들을 무대 위에서만큼은 무자비하게 표출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김수영이 박인환을 처음 만났을 때에나 일상적인 그의 행동, 성격 등을 보았을 때 그는 상당히 수줍음이 많으며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는 부조리한 현실에 상황에, 자유에 대한 갈망에 분노하였고 그럴 때면 그는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결국, 의용군 징집과 포로수용소 그리고 서울에서의 생활은 이 모든 것이 김수영을 연극배우로 만들 수밖에 없는 무대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그를 분노하고 표출하게 할 수밖에 없는 무대.
김수영의 삶을 지켜보며 알 수 있는 건 자유에 대한 갈망은 대게 분노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부인과 재회하며 가정을 새롭게 꾸려나가고, 작품 활동도 곧잘 하던 그가 다시금 자유로의 각성을 하게 된 계기로 부정선거를 꼽을 수 있다. 투표도 하지 않은 자신의 이름으로 투표가 되어있던 것.
그 이후로 김수영은 현실비판과 풍자의 시를 썼는데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같은 경우 거친 표현과 단어 선택에서 그의 분노가 잘 드러난다. 특히, 위 시에서 ‘자유는 이제 상식으로 되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와 동시에 그는 이상적인 자유에 대한 이론을 견고히 만들어 갔다.
자유란 순수한 물과 같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물이란 어떠한 불순물도 없는 투명하고 맑은 가장 순수한 상태. 김수영은 현실비판과 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려야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정권이 바뀐다고 자유가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민주적일지 몰라도 그들은 자유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자유란 타협의 산물이 아니다. 민주주의도 통일도 타협도 아닌 김수영의 자유는 순수한 원석 결정과 같은 상태이다.
자유라는 단어는 꽤나 자주, 많은 곳에서 쓰이고 현대에 들어 그 범위가 넓어졌다. 소유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경제적 자유부터 해서 세부적으로 생각해보면 정말 수많은 자유들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그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해볼 수 있는 ‘자유’란 단어는 공통적으로 하나의 속성을 가지는데 그것은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사고 싶은 옷이 있는데 돈을 아껴야 해서 못산다. 이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제약이며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자유란 모든 제약들로부터 벗어나 행동, 사유 이 모든 것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 상태이다. 자유를 김수영의 표현처럼 순수하고 맑은 물이라고 했을 때, 언제나 자유는 순수하고 맑은 물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을 해보아야 하는 것이, 사실 우주는 물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물 뿐만이 아니라 땅과 나무, 바람, 수많은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물은 물론 그 자체로 순수하고 맑은 상태의 것일지 몰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 땅과 물이 함께 있어야 호수가 되며 바다가 되고 생명이 된다. 자유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흙탕물은 어쩔 수 없다.
다르게 표현을 해보자면 인간의 자유는 마치 삼중 진자운동과 같은 것이다. 진자운동을 하는 추가 하나 혹은 두 개이면 포물선은 규칙적인 패턴을 갖는다. 순수하고 맑은 물, 자유가 그 자체로 하나의 추라고 했을 때 진자운동은 규칙적이고 평화로운 상태를 갖게 될 것이다. 허나 삶과 우주에서의 자유란 단일한 구성품이 아니며 세상은 많은 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단 하나의 진자, 두 개의 진자가 아닌 삼중 그 이상의 진자운동이다. 삼중 이상의 상호작용이 발생했을 때, 운동은 패턴이 없으며 예측 불가능해진다.
결국, 김수영의 이상으로써의 자유는 사실상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허나 언제나 자유에 대한 그의 외침을 이해한다. 순수한 물과 같은 자유가 없다면 자유에 가까워지기라도 해야 한다는 김수영의 말처럼 자유는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해 필요하다. 우리를 갉아먹는 모든 제약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달나라의 장난」에서의 팽이처럼 자유는 스스로 도는 힘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힘, 관성 등 외부적인 힘과의 상호작용이다. 자유를 위해 견제해야하는 것은 오직 팽이를 멈추게 하는 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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