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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장편소설 <밝은 밤> : 가장 인정받고 싶고 가장 상처내기 쉬운 관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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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곰 2022. 10. 1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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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 같은 무언가가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아갈 때 무력감은 빈번하게 찾아온다.

 

예를 들자면 영원할 것 같은 나의 20대가 내일모레면 끝난다는 것,

영원할 것 같던 부모님의 동작들이 점점 느려진다는 것.

 

누군가는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던데 내게 시간은 그저 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상이 영원할 것 같다고 느끼던 시절은 대개 철이 없었다.

 

그리고 가장 날카로웠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것들에 상처를 내곤 했다.

 

최은영 작가의 장편소설 <밝은 밤>

 

밝은 밤 커버

줄거리 일부 요약 (약 스포)

 

<밝은 밤>의 주인공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그와 이혼 후 희령으로 내려간다.

그녀의 이혼에는 '남자 간수 제대로 못한 여자의 잘못도 있다.'라는 손가락질이 있었고,

지연의 부모님은 그녀의 이혼을 부끄러워한다. 그녀를 갈기 찢어놓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내려온 희령에서 지연은 외할머니를 만난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왕래가 끊겼던 외할머니였다.

 

영옥(주인공 지연의 외할머니)의 이야기 中

 

전쟁으로부터 북에서 내려와 희령이라는 곳에 정착을 하게 되고 영옥(외할머니)은

길남선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 증조모(영옥의 어머니)는 그가 영옥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것을 눈치채며 결혼을 반대하지만

영옥은 증조부가 마음에 들어 하는 남선과 혼인을 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결혼 이후 영옥은 홀로 외로운 날이 많았고, 남선은 나라와 경제성장에 대해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영옥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으며 오히려 영옥이 수선 일을 하며 번 돈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영옥은 아이(주인공 지연의 엄마)를 낳아 키우던 어느 날 집으로 남선의 친모와 아내가 찾아온다.

영옥은 남선이 북에 있을 때 아내와 심지어는 아들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선은 며칠 뒤 자신의 친모와 아내와 함께 속초로 떠나게 되고 영옥에게 한치의 미안함도 없다.

영옥이 키우던 아이를 남선이 데려가려 하자 영옥은 그를 막아섰고 영옥이 아이를 키우되

길남선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증조부는 남자 한 명 붙잡지 못한다며 영옥을 나무랐다.

영옥은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죽어버리라는 얘기를 한다. 증조부는 며칠 뒤 교통사고로 돌아가게 된다.

영옥은 홀로 아이를 키우지만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영옥과 딸은 호적상 결국 남남이니까.

 

밝은 밤 내지
최은영 작가의 말

 


<밝은 밤>은 액자식 구성이 도드라지는 소설이다.

지연은 주인공인 동시에 청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외할머니로부터 '엄마'와 '외할머니 자신' 그리고 '증조모'의 이야기를 건네듣는다.

그렇게 소설은 총 4대에 걸친 여자들의 백 년 이야기로 구성이 된다.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p271)

 

엄마에게 지연의 이혼은 '평범하게 산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깨어져 버린 순간이다.

 

"나는 침묵해야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서, 내게 마음이 없는 배우자와 사는 고독에 대해서"(p85)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지연과 엄마의 말과 행동은 서로에게 칼날이 된다.

그렇게 상처를 내고 멀어진다. 지연은 엄마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밝은 밤 내지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시련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이것을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서로를 향하는 날카로움이 사실은 너를 사랑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엄마가 지연에게 바랬던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함일 텐데.

 

왜 자꾸만 평범한 삶이란 내게서 멀어지고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날은 더욱 날카로워지곤 하는 걸까.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공개수업을 하던 날이었다.

 

우리 엄마를 비롯한 10명 남짓의 학부모들이 뒤에 와 서 계셨다.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에 선생님은 나를 일으켜 세워 질문을 했다.

그 순간에는 잘 알고 있던 것들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고 우물쭈물 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선생님이 두세 번 힌트를 주고서야 답을 할 수 있었다.

 

그날 엄마와 함께 집에를 가며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것저것 내게 물어보았지만 나는 날이 선 대답만 할 뿐이었다.

멋지고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창피했던 것이었다.

 

가족이란 게 그렇다. 가장 인정받고 싶고 가장 상처내기 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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