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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 지구 종말의 이야기 그리고 외국인 유학생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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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곰 2022. 10. 1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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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지구 끝의 온실 커버


서울은 눈뜨고 코 베이는 곳이라 하지 않던가. 한국에 온 여자친구는 처음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가오는 사람을 쉽게 믿은 대가는 언제나 큰 상처였다. 진정한 호의와 말뿐인 호의 그리고 말뿐인 호의 뒤에 드리워진 불순한 마음을 구분하는 일에 훈련이 필요했다. 그녀가 한국에 온 이상 기존 삶의 방식과 가치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이곳은 더스트가 휩쓴 지구만치 온전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어학당에 다니던 시기 언어 실력에 슬럼프가 오자 시도해 본 것이 있다고 했다. 언어 교환 애플리케이션이다. 애플리케이션 스토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언어 교환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했다. 회원가입을 하고 프로필에 정보를 하나씩 기입했다.

 

국적 : 미얀마

 

사용 언어 : 미얀마어, 한국어, 영어

 

마지막으로 사진을 넣는 것으로 계정을 생성했다. 계정을 만들자 알림이 멈추지 않았고 채팅은 삽시간에 수십 개가 쌓였다고 했다. ‘우리 같이 즐길래요?’, ‘FWB(Friends with Benefit)?'와 같은 말이 득실대는 그 애플리케이션을 곧바로 지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외국인 유학생이 한국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동남아 유학생들이 더욱 그렇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한국에는 동남아에 대한 인종차별적 인식이 만연하게 내재되어 있다. 『지구 끝의 온실』을 읽는 내내 더스트가 비단 역병이나 재해 같은 것만이 아니라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더스트로 종말 한 소설 속 세계와 현실의 대한민국은 닮아있다. 슬픈 일이다.

 

소설에는 사회적 쓸모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명명으로 만들어진 군집 ‘돔’ 이 나온다. 돔 시티는 일종의 우월주의 공간이다. 한국의 특정 사람들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동남아시아 사람으로부터 일종의 우월주의를 느낀다. 그들을 열등한 종족으로 생각한다. 여자친구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이었다. 머리가 희고 벨트 위에 배를 걸친 할아버지 한 명이 그녀에게 시급을 얼마 받느냐 물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시급을 더 줄 수 있다며 제안한 것은 불건전 업소였다. 고기를 사주겠다며 같이 밥을 먹자는 아저씨도 있었다. 모두 편의점 마감을 도우러 갔을 때 목격한 광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건들이 우월주의와 열등의 이해관계가 아니면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돔 시티는 정말 최악의 인간을 모아둔 곳이었지. 이렇게 살아남을 바에는 세계가 전 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어. 난 그래서 저 타운에 사는 놈들을 싫어해. 다들 자신이 한 짓은 까맣게 잊고 사는 위선자들이지. p75

 

“한국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요.”라며 여자친구는 말했다. 한국에 유학을 온 학생들은 돔으로부터 철저히 배재가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열렬한 팬으로서 노마드 개념을 인용하자면 본인의 영토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감수해야 할 결과이기도 하다. 탈 영토화를 통하여 유목적 존재가 된 유학생들은 일종의 프림 빌리지를 창조한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집단, 나는 그것을 프림 빌리지의 이름을 빌려 유학생 빌리지라 하겠다. 유학생 빌리지에는 베트남, 태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학생들이 구성을 이룬다. 나는 유학생이 아니지만 유학생-되기의 시도를 한다. 유학생들의 생활을 간접 경험하다 보면 한국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어느 순간 우월주의에 빠지고 있는 게 아닐까 되돌아보기도 한다.

 

유학생 빌리지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알 수 있었던 것은 돔의 세계 사람들은 쉽게 그들을 침투하려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에 와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는 유학생들이 생각보다 많다. 침략을 하는 주체는 다양하다. 학교 친구,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에서 만난 사람 등. 타지 생활은 대개 외롭고 그 외로움을 파고들어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5만 원, 10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사기를 당한 친구도 있다. 유학생 빌리지는 프림 빌리지와 유사하여 외부의 침략에 취약하다. 빌리지 내부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지만 대개 공동체를 와해시킬만한 사건은 아니다. 결국 그들을 해하는 것은 돔 시티의 사람들이고 외부의 사람들이다. 언어도 생활도 쉽지 않은 그들의 약점을 아주 쉽게 파고들며 악용하는 것이다.

 

SF 소설을 읽는데 어째서인지 여자친구와 유학생 친구들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지구 끝의 온실』은 그저 과학적 상상력을 나열하기 위한 SF 소설이 아니다. 장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 개개인과 그들의 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하여 장르는 일종의 ‘낯설게 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낯설게 한다는 것은 ‘-되기’의 과정과 연결된다. 나오미 아마라 자매가 실험체가 -되고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는 인물이 -되고 모스바나를 널리 퍼뜨리는 주체가 -된다. 되기의 과정은 돔 세계의 사람들처럼 관습적인 우월주의로부터 벗어나 더 다양한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식물 인지 편향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진 오래된 습성입니다. 우리는 동물을 과대평 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합니다. 동물들의 개별성에 비해 식물들의 집단적 고유성을 폄하합니다. 식물들의 삶에 가득한 경쟁과 분투를 보지 않습니다. 문질러 지운 듯 흐릿한 식물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p365

 

마음도 감정도 물질적인 것이고, 시간의 물줄기를 맞다 보면 그 표면이 점차 깎여나 가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어떤 핵심이 남잖아요. 그렇게 남은 건 정말로 당신이 가 졌던 마음이라고요. 시간조차 그 마음을 지우지 못한 거예요. p379

 

『지구 끝의 온실』에는 모스바나라는 특별한 식물이 나온다. 푸른빛을 띠는 모스바나는 더스트의 위협으로부터 인류의 재건을 돕는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고작 하찮은 식물이 인류를 구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사람은 언제나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고 가장 아래 식물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식물과 같은 것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마음은 사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레이첼이 조작된 줄만 알았던 감정도 결국 자신의 감정이라고 깨닫는 순간이 그렇다. 레이첼은 기계임에도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조차 지우지 못하는 마음’의 강력한 힘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동물과 식물의 관계처럼 마음 반대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부정이라 할 것이다. 타자의 마음을 부정하고, 상처를 내고, 상처를 낸다는 사실조차 부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주의 사회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사람들은 부정을 택하기 시작했다. 더 개인적이고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동시에 마음을 과소평가한다. 사실은 마음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것이란 걸 잊은 채.

 


믿음과 의심이 있다면 여자친구는 언제나 믿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하여 그녀에게 의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구 끝의 온실』에서 인간들의 악함을 여실히 경험했던 나오미 아마라 자매가 그럼에도 인간을 다시 한번 믿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 실험체가 되었던 경험을 가지고 그들은 왜 증오가 아닌 믿음을 또다시 택할 수 있던 것인지.

 

미얀마는 불교 국가이다. 여자친구에게는 선생님 같은 기질이 있어 내게 불법에서 강조하는 것들을 가르쳐주곤 한다. 그녀가 내게 가르쳐주었던 교리 중 대표적인 것이 붓다의 인과법이다. 불법에서 인과법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이는 ‘선을 행하면 선으로 받는다. 악행을 행하면 악으로 받는다.’는 매우 간단명료한 이치이다. 여자친구는 인간의 불순함을 의심하는 것보다 의심하고 싫어하는 ‘마음’ 자체가 더욱 좋지 못하여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했다. 그녀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로 와 하소연하면서도 그러한 말과 행동들이 언젠가 전부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라 얘기했다. 나오미와 아마라도 그러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음이 가지고 있는 강한 힘을 알기에 인간을 다시 한번 믿어본 것이 아닐까.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된 이유도요. 저는 운명 을 믿지 않지만, 같은 것을 쫓는 사람들이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 믿거든요. 우리는 그 기이한 푸른빛에 이끌렸고, 또 같은 사람을 통해 연결되어 있네요. p254

 

종말과 가까운 대한민국에도 모스바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탈 우월주의를 통하여 유학생 빌리지 학생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이 종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체성에 한계를 부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월주의는 환상일 뿐이다. 마음은 모스바나와 같다. 마음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사람은 결국 연결된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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